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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교훈

정철의 '전라도 사람'에 부쳐에 부쳐..


 

정철의 '전라도 사람'에 부쳐


내 고향은 전라도.
높은 산, 낮은 산 그리고 너른 벌과 푸른 바다.
웃음이 가득하고 정이 뚝뚝 묻어 나는 따뜻한 곳.
좀체 싸울 일도 없던 아늑한 곳.

1972 년 서울에 오기 전 나에게 있어 전라도는 그런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사람 간의 왕래가 드물었고
타지 사람들의 사투리를 듣기 어려웠던 터라
어쩌다 방문한 서울, 충청도, 경상도 사람들의 독특한 억양을 접하고
우리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던 것이 전부였다.

중2, 서울에서의 생활은 나의 부푼 기대를 깨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급우들이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를 들어 날 놀려댔다.
분하고 억울해 싸우고 또 싸웠지만
80여 명 중 네번째로 체구가 작은 내가 애당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반을 잡겠다고 나보다 1년 먼저 상경하여
가게를 하나 열고 계셨던 아버지
일 년의 서울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해법을 찾은 걸로 보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전라도 사람은 못 사는 사람이 많아서 도둑놈도 많고 사기꾼도 많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선량한 전라도 사람들까지 욕을 먹는 것이니
우리는 바르고 또 바르게 살아 고향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지는 말씀이었다.

스무 살 넘도록 그렇게 살았다.
누가 전라도 사람 욕하면 나는 바로 살겠다는 의지를 더욱 공고히하였다.
전라도 사투리를 나름대로 교정하여 굳이 전라도 사람임을 밝히지 않으려 했다.
전라도 사투리는 간사하게 들리고
경상도 사투리는 사나이답고 화끈하게 들린다는 게 당시의 관념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TV나 라디오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깡패, 식모, 사기꾼, 막노동꾼 등은 다 전라도 사람이었다.
내가 전라도 사람인 줄 모르던 친구 어머니께서 전라도를 욕해도
나는 내가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할 그 무엇인 것처럼 저항없이 받아들이곤 했다.

지극히 수동적인 나의 마음을 뒤트는 말이 하나 존재하였 던 건
전라도에 대한 지극히 사시적인 안목에 대한 마지막 남은 보루 같은 게 아니었을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은 열이면 여덟 아홉은 '전라도 사람'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전라도 것들' 또는 '전라도 치들', '전라도 새끼들'이었다.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구나......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일어난 때가 그 즈음이었다.
71년 대선 이야기 조각 몇 개를 뇌리에 각인했다.
집안 형으로부터 김대중의 똑똑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업계 1위였던 삼학 소주가 도산한 이야기도 들었다.
대구 부산에
'전라도여 단결하자'는 포스터가 수도 없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이효상이라는 사람이 대구 수성천변 연설에서
이 정권을 전라도 사람에게 넘겨 줘서야 되겠느냐고 거품을 토했다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고등학생이었던 지극히 평범한(?) 나는
순간 분노의 감정을 잠깐 표현했을 뿐 축구, 야구에 더 정신을 쏟았다.
그 당시 내가 전라도 사람이어서 불편했던 건
명절에 귀성열차표 예매가 참 어려웠다는 거 정도.
밤을 새워 기다렸는데도
내 앞에 삼십여 명 정도밖에 없었는데도
언제나 매진인 기차표를 원망했을뿐.

유신의 폭압 속에서도 나는 몸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80 년.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경상도 군인을 배치하여 전라도 씨를 말린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고숙은 곤봉을 뒤통수에 맞고 쓰러졌다가
나이 든 얼굴을 확인한 공수부대원의 배려(?)로 살아 남았으며
내종 형은 맞고 뻗은 척 엎드려 있다가 살아 남았다고 했다.
무서움만 극에 달했다.

태생이 험악한 인상인 나는 천호대교를 건너는 것이 고역이었다.
버스 안에 무장한 공수부대원이 쏘아 대는 눈길에 가슴을 수도 없이 졸였다.
잡혀 나간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자비하게 구타 당하는 모습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잡혀가고 선배들이 후배들이 사라져 갔다.
전두환은 별명 그대로 살인마였다.
그렇게 공포의 7년이 흘러 갔다.

그동안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문장이 더욱 공고해졌고
그를 지지하는 전라도도 빨갱이가 되어갔다.
전라도는 전라도 아닌 국민들로부터 더욱 격리되었다.
그런 인과관계 속에 나도 격리되었다.

사소한 곳에서 나의 분노는 시작 되었다.
아니 축적되었던 것이 사소함을 빌미로 표출되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독재정치를 혐오하는 정도였을 뿐
각성되지 않았던 나는 심드렁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사법시험 공부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었던 내게
작은 꼬투리 두 개가 잡혔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다.
실망스럽게 양김은 분열하였고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과 더불어
네 명의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대통령선거에 돌입하였다.

김대중 사면 복권 전에 김영삼은
김대중이 사면 복권되면 대선 후보를 양보할 거라 하였고
김대중도 자신이 사면 복권되면 불출마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사면 복권되었고 양김은 약속을 번복하고 분열 하였다.

내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예의 그 전라도가 튀어 나왔다.
거짓말쟁이 김대중, 사기꾼 전라도......
비슷한 양의 잘못을 하였는데
왜 비난의 십자포화는 김대중과 전라도에만 쏟아지는가......
전라도라서......?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쳔이다.
거의 한 평생 교회에 출석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분이다.
교회에서도 적절한 평판을 유지하시는데 큰 허물이 없었고
신앙생활 중 마음이 많이 합치하는 몇몇 분들과 모이을 만들어
평생의 동반자로 삼고 지금껏 지내오고 계신다.
그 어머니가 그 신앙의 동지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때가 87년 대선이다.

모임 중 유일한 전라도 사람이었던 어머니는
어느 때부터인가 그 동지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나타나시면
황급히 대화의 문을 닫았고
어머니는 이어진 써늘한 기운을 느끼셨던 것이다.
눈치 빠르신 어머니는 사태를 파악하셨고
주체할 수 없는 배신감을 눈물과 기도로 달래셨다.
내가 견뎌야 했던 전라도 차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선거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어머니가 몸소 느껴야 했던 이 지독한 편견.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귀가시계라 할 만큼 이 나라 남정네들의 관심을 모았던 드라마였다.
거기에 주연으로 나오는 세 친구가 있었다.
배우 박상원, 최민수, 정성모가 배역을 맡았는데
드라마 중에서 이들은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박상원은 검사 역을, 최민수와 정성모는 조폭 역을맡았는데
최민수는 남자답고 멋 있는 조폭으로
정성모는 교활하고 더러운 조폭으로 묘사되었다.
여기까지야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어릴 때는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컸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비열한 배역의 정성모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드라마의 축이라 할 수 있는
이른 바 폼 나는 배역의 박상원, 최민수는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창작물 속에서도
전라도는 자연스럽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짓밟히고 있었다.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만든 장치를 가지고
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그에게는 단순한 장치로 보였을지 모르나 내게는 아픔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변함 없는 의지와 투쟁.
내가 김대중에게 붙일 수 있는 헌사이다.
내가 객관적 입장을 다지고 또 다지고 보아도(물론 당연히 주관적이라고 하겠지만)
역대 정치인 중 군계일학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김대중이다.
노벨 평화상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로비에 의해 노벨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항의단을 구성해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항의하러 가기도 했다.
로비에 의해 모든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뇌 구조가 신기했다.

나는 다른 사람 듣는 데서 김대중을 칭찬한 적 없다.
"너 전라도지?"
"전라도 사람이니까 당연하겠지......"
반사적으로 이 말이 돌아올 걸 알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그냥 김대중이 싫다고 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였는데
그때 정말 행복했던 것이
나는 노무현을 경상도 사람을 지지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긴 그때도 "전라도니까......"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노무현을 지지하다 보니
그와 관련된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거기서 내 서울 생활 35 년을 반추할 수 있는 글을 하나 만났다.

민주당 국민경선 시
광주 경선을 앞두고 금천온라인이라는 아이디의 '충장로의 당신에게'라는 글이었다.
이 글을 읽어 나가는 중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겪었던 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아픔을 간직하며 살았던 나의 분신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해자?
피해자?
문제는 치유책이었다.
개개인으로서는 더없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선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건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정치인들이 교묘히 자극하는 이기심에 매몰되어
까닭 없는 증오와 편견을 갖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지 말 것을 권유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여전히 TV 드라마 속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대우 받지 못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다.
그럴 듯한 배역에서는 결코 전라도 사투리가 흘러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는 전라도 사람들의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전히 조폭 하면 전라도가 생각나는 시대이다.
나의 아버지 말씀처럼 정말 먹고 살 게 없어서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깡패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기치고 뒷통수 쳤던 사람들이 이들이었는지 모른다.
중랑천에서 거여동으로 성남으로......
쫓기고 쫓겨 나간 그들의 입에서 사실 전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

전라도에 대해 편견을 가진 그대에게 묻는다.
과연 전라도 사람만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가?
깡패, 사기꾼, 도둑놈의 출신지를 취합 평가해서 그 결론에 따라
전라도 출신이 랭킹 1위를 점하였기에 그래서 전라도를 욕하고 있는가?
전라도에 대한 비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전라도의 열악한 경제 여건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전라도 사람


정철

정철님의 '전라도 사람'을 읽고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하여 보았습니다. 격정이묻어나는 부분이 적지 않아 조심스럽습니다만 솔직함도 미덕인 것 같아 그대로 써보았습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 다를 수 있겠지요. 저는 좀 비뚜러져 그런지 모든 게 반듯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사람이 지역, 성별, 학력......이러한 것들로 인해 차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누군가가 꽃을 이야기 하면, 우리는 향기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꽃의 90%는 향기가 없거나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절을 이야기 하면, 우리는 깊은 산속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절의 절반 가까이는 서울 도심에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전라도 사람 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가끔은 당신이 상식이라 믿고 있는 것들을 의심해 보십시오.


-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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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쓰신 철이 형님의 글을 김재태(필명:자유)님이 부쳐 쓰신 글을
미니홈피 한 공간에 있는 걸  발견하고 올립니다.
저는 경상도 사람으로서 부산에만 있을때는 안보이던 것들.

부산속에 있을때는 전라도 친구 하나 보여도 특별히 차별대한적 없다고 생각했으나...
어느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을 하라면...

주변에서 전라도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는 말들...
이런거죠 사람은 좋은 일은 기억 못해도 나쁜일은 잘 기억합니다.

내가 때린건 기억못해도 맞은건 기억하는 법이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군대나 사회생활중에 못된 사람 하나둘 안만났겠습니까?
그 사람이 전라도 출신인것 뿐인데 우린 덧칠하지 않았는지요..?

특히 당시 독재정부의 전라도 소외전략과 맞물리면서 말입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전라도 친구가 못되게 군적도 많지만..
경상도 친구들중에서도 못되게 군친구도 많습니다.

그런식으로 따지면 경상도는 다 좋은 사람들만 살고 깡패는 하나도 없겠지만..
우리의 뿌리 깊은 의식에는 전라도기에...그렇다는 것이죠..


제발 지역이 갈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이런 글을 경상도 출신인  내가 안올려도  정당성이 라든가 그림이

좋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위하여..


- 노엘


저자소개
정철님은 카피라이터로 송강 정철 선생이 아니다. 영어로 유명한 정철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 카피’라 부른다. 1985년 MBC애드컴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24년째 카피를 쓰고 있다. 서울 카피라이터즈 클럽(S.C.C.) 부회장,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겸임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정철카피’ 대표로 기아 자동차, 이랜드, 하이트 맥주 등의 광고 카피를 써 오고 있다. 2006년 지방 선거 때 ‘보람이가 행복한 서울’로 천편일률적인 정치 광고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는 평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씹어먹는 책 이빨』, 『불행은 따로국밥이다』 등이 있다. 두 책은 이제 아는 사람만 아는 컬트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신문에서 『씹어먹는 책 이빨』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은 칼럼을 보고 다시 펜을 잡기로 결심했다. 그의 펜 끝은 당신의 심장을 향한다.

그리고 촛불정국에 블로그에 올린글인 "촛불센스", "한 글자로 말하는 대한민국" 등이  다음 아고라에서  회자되어 아주 유명하다

오늘의 촛불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375801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380790

한 글자로 말하는 대한민국보기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427013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429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