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몽





1. 선악과

사리 분별을 좀 알았다고 깝죽대던 시절에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이야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선악과를 따 먹고 사리 분별의 지혜가 생기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반지성주의요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노예화하려는 기독교의 우민화 술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좀 들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만만치 않은 내용들임을 알게 되면서 그런 반감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선악과의 이야기는 여전히 잘 해결되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2. 이성에 대하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말한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하여 이성을 좀 사용한다는 것이지, 주로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생각의 과정에서 많은 비이성적인 것들이 작용을 한다. 본능은 이성으로 쉽게 누르지 못하는 큰 힘을 가진 존재이다. 또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들도 많은 부분이 이성의 촉각이 잘 닫지 않는 영역에 숨어 본능만큼이나 큰 힘을 작용한다. 콤플렉스니 트라우마니 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잘 누르고 바른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난관이 있다. 이성적 결론은 그 자체로 행동을 이끌지는 못한다. 행동은 감성의 힘으로 이뤄진다. 이성을 감성화하는 과정에서 비로 그 과정에서 또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작동을 한다. 즉 결론은 옳더라도 그 결론에 맞춰 어느 정도로 행동화할 것인가의 행동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문제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무의식의 영향을 받으므로 행동 수준의 적절성은 여전히 비이성적이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이전에 더 큰 이성의 취약성이 존재한다. 생각은 보고, 겪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그 경험은 전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감각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 중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추려서 인식을 한다. 그리고 그 추리는 과정은 이성의 작용 이전에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은 보는 대로 아는 것”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옳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자기가 보지 못한 부분을 모르는 공백으로 놓아두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놓아두지를 못한다. 보지 못한 부분은 앞, 뒤를 연결하여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 이 만들어낸 사실은 본래 보고, 들은 사실과 융합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사람은 선입견을 깨기 힘들다. 또 스스로를 이성적인 사람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본능에 충실한 사람보다 오히려 더 심한 선입견의 노예가 되는 현상도 다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다.

3. 협동의 본능과 경쟁의 본능

지구상에 존재하는 몬든 생물 종은 협동의 본능과 경쟁의 본능을 가진다. 경쟁에 이기는 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가 늘어난다. 따라서 경쟁자를 보면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게 하는 유전자와 같이 경쟁 본능을 자극하는 유전자가 그렇지 못한 유전자보다는 더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런데 종 전체로 보면 경쟁이 만능은 아니다. 종 내 경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종은 종 전체로는 경쟁력을 잃는다. 결국 다른 종과의 싸움에서 밀려서 그 종은 멸종되게 되는 것이다. 협동하지 못하는 종은 오래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종은 협동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협동 역시 경쟁과 마찬가지로 본능인 것이다.

이는 동물의 관찰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동물은 이기적이요, 사람만이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은 다 허구이다. 20세기 중반까지의 인간의 동물 관찰은 주로 가두어 놓고 하는 관찰이었다. 가두지 않은 관찰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개입으로 당황하고 혼란되고 긴장한 상태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여러 가지 장비들의 발달에 힘입어 어떠한 추가적인 긴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놓아 둔 채로 동물들을 관찰한 결과들이 보고되기 시작한다. 그 관찰의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동물의 이타성, 협동성은 결코 인간에 못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의 보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경쟁적이며, 가장 이기적인 존재는 인간이 아닐까라는, 인간은 오히려 동물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협동 역시 본능의 하나이다. 학습으로 얻어지는 후천적인 것만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본능에 맞춰 행동할 때 기쁨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는 본능의 하나인 것이다. 경쟁의 본능을 기준으로 인간을 보는 것이 성악설이요, 협동을 기준으로 인간을 보는 것이 성선설이다. 이 둘은 모두 옳은 이야기이다.

4. 제물로 바쳐진 한 사내

선악의 정의란 본래 간단하다. 여럿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이 선이요, 여럿에게 해롭게 작용하는 것이 악이다. 그러나 이를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무엇이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주변에서 사주하는 대로, 그것이 네게 해롭다고 하면 그것이 악인줄 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기를 꺼려한다. 말하기만 꺼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 사람 마음속에는 경쟁의 본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의 본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을 동원해 이를 속이게 된다. 자신에 취향에 맞는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추려내고, 이들의 사이를 선입견에서 비롯된 그릇된 추론으로 연결한다. 그 결론으로 자신의 경쟁 본능이 이미 악이라 규정지은 대상을 사회적 기준의 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하는 짓이다.

기득권자만의 세상을 거부하던 한 사내가 있었다. 기득권자들의 마음에는 그는 악이라 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경쟁의 본능으로 이미 규정지은 대로 그를 악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 한 사내를 악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모든 주변을 뒤져대고, 단 1%라도 악으로 해석이 가능할 가능성이 보이는 사실이 있으면 이를 악이라 해석하여 세상에 떠벌였다. 그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자, 이제 그들은 그 사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악이라 규정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악이라 규정되어야만 하는 한 사내가 끝내 악으로 규정되지 않고 남아있는 사실에 그들은 조바심을 내고 안달을 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어려움은 참을 수 있었지만, 자신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같이 꿈꾸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 사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협동의 본능이 살아있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경쟁의 본능만 살아 시퍼런 칼날을 번득이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는 이 세상이 하루 하루 더 지옥으로 바뀌는 것이 멈추고 싶었고, 그래서 그에게 남은 마지막의 것. 그의 생명을 제물로 바쳤다.


5. 바보 노무현

그는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정치에 뛰어든 것이라고 했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경쟁의 본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생적으로 협동의 본능이 더 앞서는 사람이다. 애당초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는 그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과도 연합을 하자고 했다. 나는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짓밟혔던 모든 사람들의 상처가 다 씻어지는 해원의 시대에나 가능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깔려있는 그 이상의 크기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상의 인간이었다. 정치에 꼭 필요한 그러나 정치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인간이 그였다.

그는 원칙과 상식을 이야기했다. 인류의 역사의 오랜 비극의 경험에 따라 세상의 원칙은 협동의 본능에 많이 맞춰져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원칙을 어긴다. 겉으로는 원칙에 동의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은 원칙을 어길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경쟁의 본능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그러하다. 그는 이러한 원칙의 파괴자들을 죄를 묻고 배제하기 보다는 설득하여 끌어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원칙과 상식을 말했다.

그는 그릇된 언론에 대해 단호했다. 사실을 공유할 때 인간은 본능에 의해 사주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선입견에 의해 취사선택된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여럿이 토론하여 결론 내린 사실이 판단의 근거로 공유되는 세상. 그것이 그가 꿈꾸든 세상이었다. 경쟁의 본능에 의해 마구 휘둘리는 허약한 이성이 타인을 함부로 악이라 규정하여 징치하는 그 지옥도. 그 지옥도를 멈추기를 그는 너무도 열망했다. 그래서 그는 단신으로, 또 그와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모아 거대한 언론의 힘에 저항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일들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못내 부끄러워했다. 누가 감히 그토록 거대한 이상을 단 몇년만에 이루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애당초 한 인간의 힘으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루어낸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퇴임 후에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계속 하려 했다. 그 일을 위해 만들었던 사이버 공간을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 이름 지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 불렀다.


6. 역사 그리고 신화

봉하마을에서 만난 아직도 소녀의 감성이 남아있어 눈물 많은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바보 노무현이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지 못하고 간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가 재임 중에 겪은 일, 그가 진정 하고자 하는 일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면 우리에게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말도 했다.

그에게 차분히 회고록을 쓸 시간만 주었더라도 그의 이상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악이라 규정짓고 싶었던 이들은 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노무현이라는 자연인이 한 전임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겠지만 한 이상가로 기록되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싶어했다. 그들에게 바보 노무현은 악으로 규정되고 악으로 남아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했을까? 어쩌면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근거를 중시하는 역사는 바보 노무현을 이상가로 기록하기를 꺼려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한 이상가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끝내 방해받았던 사내는 이제 역사가 아니라 신화가 되어버렸다. 그가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

 5월 25일 그의 동지라 불리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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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해서...일몽님 글을 옮깁니다

<원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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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경진(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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